북한을 배경으로 한 소설 중에 이전 스타 소설가 장강명님이 쓴 '우리의 소원은 전쟁'이라는 소설이 있었다. 읽을거리로써도 매우 재미있었고, 늘 가까이 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 본 적 없었던 북한에 대해 여러 상상과 생각을 해 보게 해주는 좋은 책이었다.
2023.06.19 - [Book Reviews] - 우리의 소원은 전쟁 by 장강명
하지만 이번에 우연한 기회에 읽게 된 '태양을 훔친 여자'는 위 '우리의 소원은 전쟁'보다 훨씬 이야기적으로 흥미진진하고, 북한에 대해 더욱 깊게 이해하게 하며, 나아가 북한에 있는 우리 민족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한국어를 쓰는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의 특징에 대해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이 소설은 '회귀물'이다. 책 띠지 광고 문안에 있는 대로 얼마 전 종영한 인기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처럼, 죽고 나니 과거의 어느 시점의 자신으로 다시 환생 (혹은 되돌아가는 것)하여 다시 삶을 살아가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주인공 봄순은 최초 2015년에 비참한 죽음을 당하지만, 모든 기억을 가지고 1998년의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서 다시 삶을 시작한다.
봄순이 돌아간 1998년은 상당히 절묘한 시점이다. 모든 삶을 깨끗이 다시 살기에는 이미 많은 것이 바꿀 수 없도록 정해진 이후의 시점이다. 98년 시점에는 이미 결혼을 해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낸 설정에서 보듯 봄순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국가/사회적으로도 90년대말 고난의 행군기를 지나 김정일이 북한의 제2대 통치자로 확실히 정권을 잡으며 정치범 수용소를 중심으로 자기 스타일의 공포 정치를 확립해 가는 것과 함께, 공산당의 통치가 무너져가며 시장주의 영향과 자력갱생이 노력이 북한 사회 전체에 퍼져 나가는 그런 시기였다.
이러한 사회 배경에서 봄순은 미래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북한 사회에서 여자로서, 그리고 또 자립력을 갖춘 담대한 돈주 (북한의 사업가, 자본가의 성격을 가진 존재) 로서 강해 지고 성장해 나가는 길을 걷게 된다. 그 사이에 만나게 되는 북한의 여러 계층들의 이야기와 생명력은 이 이야기를 더욱 감동 깊게 만드는 매우 훌륭한 양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며 3번 정도 울컥했다. 그건 바로 가난 속에서 희망을 찾고, 몸을 던져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어떠한 고생도 마다 하지 않는 '불굴의 한국인'의 초상을 이 소설 안의 북한 사람들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고용해 주고 어려움을 헤아려 준 주인공에게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모습에서, 70년간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표방하고 사람들을 세뇌해 와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갖는 어떤 경제적 본능은 거스를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한편으로는 되게 어색하고 불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게 해서라도 감사함을 표하고 충성을 표하는 사람들의 단순함과 우직함에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한편으로 여성이 북한 사회에서 위법과 합법의 경계를 넘나들고, 권력의 핵심인 당과 행정조직의 사람들과 협상하고 뇌물을 먹이며 담대히 성장해 나가는 모습도 매우 통쾌하고 재미있었다. 특히 마지막까지 가부장적, 유교적 가정관, 남성관, 연애관을 견지하던 주인공이, 마침내 목표하던 수준의 재산과 정치적 지위를 확보하게 되면서 스스로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적으로 되돌아 보고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는 부분은 상당히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변화하는 과정을, 생각보다 매우 섬세하고 설득력 있게 하나 하나 중요한 표정과 말, 그리고 몸짓으로 표현해 낸 것에서 문학적으로도 꽤 즐거운 책읽기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언젠가 요즘 시대의 소설 문학의 가치에 대해 논한 적이 있다. 웹툰이나 드라마, 영화보다는 재미 없고, 그렇다고 실제 실용적인 도움을 얻는 통로로서도 딱히 효율적인 수단이 아닌 '소설 문학'이 2020년대인 지금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에 대한 고민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는 그 해답을 '간접 경험'에서 찾는다. 인간으로서 유한한 우리의 삶에서 소설 만큼 훌륭한 간접 경험 수단이 또 있을까? 생각보다 텍스트는 정말 많은 정보를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고, 영화와 드라마와 달리 상상력을 한정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간접 경험을 통해 얻는 지혜와 상식, 그리고 감정의 움직임은 충분히 한 개인의 경험치와 인간적 가능성을 향상 시킬 수 있는 실용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마치 친구나 다른 사람의 후기 또는 체험담을 읽어서 어떤 제품이나 창작물, 서비스에 대해 여러가지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것과도 같다.
따라서 앞으로는 단순히 개인의 감정을 다루는 사소설류나, 역사 소설 이런 것보다 다분히 실제 체험에 근거한 이런 '태양을 훔친 여자' 류의 소설이 훨씬 높은 가치와 인기를 얻을 것으로 보인다. 같은 맥락에서 쓰여진 이인열 수사관의 '열대야' 같은 것도 정말 한 번 읽어 볼만 하다.
2023.06.19 - [Book Reviews] - 열대야 by 이인열
간만에 유튜브와 각종 유혹을 이겨내고 흥미진진하게 몰입해서 읽었다. 이야기로서도 최고고, 북한 사회와 경제의 변화를 한 개인과 한 여성의 시각에서 보는 방법을 알기 위해서도 훌륭한 책이다.
자신있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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