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이라는 작가는 정말 특별하다. 일본 작가 미시마 유키오 같이 상당히 남성적이며, 한편으로 매우 보수적인 가치를 높이 사는 그런 개성을 가졌다.
사나이들의 이야기를 풀어 내는데, 이를 아름답고 정제된 문장과 어휘로 정말 멋지게 펼쳐낸다.
칼의노래, 남한산성 이 두 작품을 읽고 나는 김훈의 완전한 팬이 되었다. 이만큼 진지하고 힘있게 한국어의 가능성을 남성적인 측면에서 넓혀내는 작가가 또 있을까? 최근의 소설은 너무나 연약하고 신변잡기적인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강함보다는 약함을 노래하고, 성실과 진취보다는 체념을 묘사한다. 김훈은 이런 쉬운 유혹에 사로잡히지 않는 작가다.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적도 아군도 없다. 생을 치열하게 추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고 또 강렬하게 그려내는 작가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을 누군가가 소설로 써야 한다면, 역시 김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중근도, 이토 히로부미도, 그 당시를 살아낸 한반도의 사람들도, 또 당시 일본 밖으로 세력을 뻗던 제국주의 일본의 사람들도 지금과는 아주 다른 생각과 사상, 감정과 열망을 지닌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온전히 담아내고 펼쳐 낸 것이 바로 이 김훈의 소설 '하얼빈'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나는 이 작품의 수명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 글은 몇년을 살아 낼 수 있을까? 유명 작가의 베스트셀러라고 하더라도 시간의 흐름을 맞으면 십수년을 버티지 못하고 사그러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이 소설은 김훈의 다른 소설 칼의 노래, 남한산성과 함께 조선 3부작으로 오래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에서 나오는 안중근이나, 이토 히로부미, 그리고 당시 일본군주 메이지 천황, 동지 우덕순 등등은 결국 우리가 아는 역사상의 인물이라기 보다는, 결국 김훈의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protagonist (주인공) 들의 반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혹한 역사적 위기 속에서 미약한 개인이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짐을 짊어지고 투쟁을 결의하거나 또는 투쟁을 강요당하는 상황 속의 한 남자 (주인공)가 있고, 이 사람 앞에는 강력하고 숭고함까지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적이 있다. 주인공은 한없이 외롭지만, 그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주인공을 지원하기도 하고, 방해하기도 한다. 모두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복잡해 보여도 결국 자신의 삶을 묵묵히, 또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다. 주인공과 인물들은 그 안에서 끊임없이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답하고, 또 살아있음을 여러가지로 증명한다. 그것은 싸움이 될 수도 있고,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고민이 될 수도 있다.
적들 또한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다. 김훈의 소설에서 독자는 언제든지 주인공 뿐만 아니라 적의 관점에서도 이야기를 재구성할 수 있다. 이전 칼의 노래 같은 소설은 일본어로도 번역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순신 이야기를 반드시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처럼 무조건 우호적으로 좋아하는 것만은 아닌 일본에서도 꽤나 잘 팔린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바로 위와 같은 특성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김훈의 소설에서 강력한 적들 또한 그들의 명분과, 그들의 위엄, 또 그들의 약함이 있다. 김훈의 소설을 보고 있자면 주인공과 적들, 그리고 주변 인물 모두가 하나의 불꽃 같다. 이것들이 서로 얽히면서 더욱 큰 불길을 만들어내는 느낌이다. 이렇게 타올라서 결국 무엇을 하려는가? 라는 질문에는 답이 없다. 언젠가 꺼질 것을 알면서 그저 더욱 아름답게 타오르는 것 만을 목표로 불길이 춤을 추는 것 같다.
하얼빈을 읽으며 흥미있었던 것은 서양인 신부들의 안중근에 대한 태도였다. 역시 실제 역사적 인물인 뮈텔 주교 (조선-경성 대목구장) 와 역시 실제로 안중근에게 세례를 준 바 있는 빌렘신부가 안중근을 바라보는 눈과 안중근의 거사에 소식을 듣고 난 후, 놀라움 속에서 그 의미와 원인을 자기 나름의 이해로 살펴 보려는 시도가 매우 흥미로웠다. 서양인이자 천주교 사제로서의 그들이 인식하는 안중근은, 조선 사람들 (또는 그 후예인 한국인들)이나, 일본인이 바라보는 안중근과 사뭇 다르다. 영웅도, 테러리스트도 아닌 또 다른 존재인 것이다. 세계의 오지에서 만난 한 총명하고 비범한 기개를 가진 현지 청년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무엇이 효과적인 투쟁인지 제대로 알 리 없는 가련하고 미련한 존재이기도 하다. 만약 당신이 예를들어 UN에 근무하는 한국 외교관인데, 우크라이나에 가서 여러 활동 같은 것을 하다가 만난 한국 문화를 사랑하고 당신과도 어느 정도의 친교를 가졌던 우크라이나의 한 비범한 청년이 푸틴을 암살하겠다고 (예를들어) 독-러 정상회담 장에 가서 푸틴을 암살해 버렸다라는 소식을 들으면 어떨 것 같은가? 바로 이 관점에서도 안중근을 관찰했다는 점을 읽으며 나는 이 소설이 진실로 한 인간을 깊이 탐구하는 작품이구나, 라고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멋진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멀리 여행을 떠나고 싶어진다. 출장이라도 좋으니 어딘가 훌쩍 혼자 떠나고 싶은 것이다. 뭐 떠난다고 해서 엄청난 일이 일어 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여서 새로운 바람과 새로운 향이 있는 땅 위에 서서 이런 소설의 여운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아직 누군가는 이런 가치있는 글을 묵묵히 쓰고 있다는 것에 경외심이 든다.
** 만약 이 글을 읽고, 이 책을 읽기로 했다면 아래 링크를 활용해 주기를 부탁드립니다.**
(쿠팡파트너스 활동 일환으로, 이 링크를 통해 구매하면 작성자에게도 소정의 수수료 발생)
'Book Review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암자전 by 이병철 (0) | 2023.02.12 |
---|---|
대만은 왜 중국에 맞서는가 by 뤼슈롄(呂秀蓮) (1) | 2023.02.03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by 요한 볼프강 폰 괴테 (0) | 2023.01.15 |
ある男 (한 남자) by 平野啓一郎 (히라노 게이치로) (1) | 2022.12.24 |
유튜버가 사라지는 미래 (ユーチューバーが消滅する未来) by 오카다 토시오 (岡田斗司夫) (0) | 2022.12.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