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가 젊은 시절에 쓴 작품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참 특별한 작품이다.
착하고 열정적인 마음을 가졌고, 매우 지적이지만 순수하고 낭만적인 영혼을 가진 주인공 베르테르가 사랑해서는 안될 유부녀 샤로테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어 겪는 격정과 절망을 애절한 편지 형식의 글로 묶은 소설이다.
호메로스를 즐겨 읽고 신분과 재산보다는 인간 그 자체를 보려고 하는 주인공 베르테르는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이지만, 스스로가 세상에 의해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젊은이이다. 그의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를 도와주고자 여러 현실적인 조언을 하고 일자리를 주선하여 주기도 하지만, 그에게는 모두 덧없고 불만족스럽기만 할 뿐이다. 그는 평민은 아니기에 소박한 평민들과도 거리를 두어야 하고, 하급귀족이기에 최상층의 사람들과도 거리를 둘 수 밖에 없다. 그에게 현실은 끝없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 뿐 아니라, 그를 한없이 외롭게 만들 뿐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벗어나 요양을 위해 훌쩍 떠나온 곳에서 베르테르는 샤로테를 만난다. 그리고 그는 첫눈에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녀가 이미 알베르트라고 하는 약혼자와 약혼한 사이임을 알고 다시 자신의 운명이 또 자신을 시험과 못된 장난에 빠트렸음을 알고 괴로워한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스스로가 다른 사람과 달리 '매우 특별한 존재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이것은 일종의 착각이라고 보는게 타당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생각 (혹은 착각) 때문에, 객관적인 조건 하에서는 상당히 쟁취하기 어렵거나, 또는 그 쟁취의 추구가 남들에게 비난을 받을 수도 있는 어떠한 대상을 진심으로 원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깔끔히 포기하기 보다는 그 대상에 대해 더욱 집착하고, 그 대상을 더 열렬히 사랑하며, 더욱 간절히 원하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대상 자체와, 그 대상을 향한 우리의 열정을 한없이 아름답고 열정적인 것으로 인식하며 이들을 미화하는 경험 또한 하게 된다. 즉, '다른 사람과 달리 나는 특별하므로 그 대상을 소유할 권리가 있다'라는 판단을 근거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상이 비록 세상이 쉽게 허락하지 않는 것일지라도 용감하게 욕망하고 달려들곤 하는 것이다.
나는 괴테가 이 소설에서 묘사한 베르테르의 사랑을 불륜이라고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가 이 사랑을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기 위한 절제, 노력 모두 숭고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가 키워나간 샤로테에 대한 순수하고 절대적인 사랑의 감정은 그 자체로 가슴이 먹먹해질 만큼 애절한 것이고 무척 깊은 아름다움을 갖춘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이 결국은 좌절될 수밖에 없음을 확인한 베르테르가 자기 파멸을 선택하였을 때, 그 아쉬움과 절망감은 정말 가슴 깊은 곳을 때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일본의 할복자살에 대한 숭배와 특유의 미의식과도 묘하게 통하는 구석이 있는 이 마음은 도대체 무엇인가, 과연 이러한 자결(自決)은 정말로 숭고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베르테르적인 상황에 직면할 때가 있다. 비록 현실 세계에서 우리의 사랑은 소맥 폭탄주 또는 와인 또는 사케 또는 위스키 등등 알코올에 절고, 이것 저것 조건을 재는 속물적인 인간관계의 한 부류이며, 때로는 성욕에 그저 오염되어 있고, 힘들고 지루한 일상에 변화를 가져다 주는 가벼운 카톡 대화로 상징되는 '썸'의 시간이 대부분이며, 결국엔 다시 조건을 재고 외모를 따지는 구질구질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결국 그 본질만을 본다면 결국 몸과 마음이 순수하게 끌리는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것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때로, 그러한 연애의 상대방은 자신이 일반적인 상황에서 만나거나 원해서는 안되는 사람인 경우가 있다. 대부분은 그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거나, 설령 진전이 었어도 가벼운 관계로 끝나지만, 이것이 진지한 관계로 발전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바로 이렇게 문제가 진지해지기 시작할 때, 베르테르 처럼 한쪽이 지나치게 큰 사랑을 가져버리고, 이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 쪽은 그 열정에 끌려가기는 하고, 나름 이런 관계를 가볍지 않게 생각하기는 해도 결코 선을 넘을 생각이 없는 마음의 불균형이 발생하기도 하고, 이럴 때 바로 이 소설의 배경과 비슷한 상황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스스로가 베르테르의 입장에 서 있든, 샤로테의 입장에 서 있든 선택을 해야 한다. 소설과 달리 우리 삶은 계속 흘러가며, 미래에도 어떤 식으로든 계속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보통은 베르테르 입장의 사람은 한없는 슬픔과 절망에 빠지고, 샤로테 입장에 있는 사람은 고마우면서도 부담이 점점 커지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경우 가장 바람직한 해결책은 그때 그때 다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이 소설을 읽으며 베르테르와 샤로테, 그리고 괴테가 소설 속에서 제시하는 다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진 캐릭터들'을 천천히 음미하면 분명 상대방을 더욱 더 배려해 주고 이해해 줄 수 있는 해결책을 찾아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런 해결책을 찾는건 그래도 여전히 무척 어렵겠지만.... 애초에 이러한 상황이 감당이 안되면, 아예 이런 상황으로 발전시킬 여지를 차단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샤로테가 너무 베르테르에게 소위 '여지'를 많이 주었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책임질 수 없는 일이라면 아예 냉정하게 끊어버리는 게 최선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소설은 분명 '인간적인 가치'가 큰 의미를 가졌던 지난 시대까지는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의 급격한 발전이 더욱 심화되고, 인간적인 가치가 하나의 '오류의 원인'이 되어 버리는 시대에서는 과연 어떻게 읽혀지게 될까 궁금하다. 쇼팽과 베토벤의 음악과 같이 극적이고 아름다운 무언가로서 남게 될 것인지, 아니면 문학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결국 의미 없는 낡은 과거 시대의 유물로 전락하여 사라져 버릴지 (개인적으로 추상성이 높은 음악이나 미술이 소설과 같은 구체적 이야기보다 더욱 보편적이고 수명이 긴 예술적 가치를 가진다고 믿는다), 정말 궁금하다.
개인적으로 짝사랑의 달인이자 질풍노도적 사랑의 감정을 아름답게 여기던 나 조차, 나이를 먹고 변화하는 현실을 경험하며 많이 변해 버려서 이제 이런 소설이나 영화를 보아도 이해는 가지만 예전처럼 몰두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되었뜬 시간의 흐름을 견뎌 낸 작품은 정말 늘 특별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은 무려 1774년에 출간되었다고 한다. 정조가 조선을 다스리던 시기이다. 이때 이미 독일에서는 이러한 사랑의 감정을 적나라하고 아름답게 묘사해 내고, '자살'이라는 주제를 윤리적인 관점, 종교적 관점이 아닌 인간적 관점에서 다룬 소설이 출간되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이 책을 읽고 있을 때 한 아이가 내가 읽던 책에 자기가 가지고 놀던 공주 스티커를 표지에 붙였다. 나중에 이 아이가 내 나이가 되었을 때에도 이 책이 계속 생명력과 가치를 유지할 수 있을런지, 그때는 어떤 식으로 가치를 가질 것인지 궁금하고 또 기대도 된다.
이 책은 민음사 판본 (박찬기 옮김)으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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