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무척 진지한 자세로 이 책을 읽을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기대도 컸다. 분명히 이 소설 안에는 '내'가 있을 것이라고 마음대로 기대했다. 위로받고 싶었다. 이 소설을 읽기도 전에 나는 이미 이 소설을 좋아하고 있었다.
이 소설은 '위로' 이상이었다. 오히려 '칭찬' 이었다. 주인공 요조(大庭葉蔵)에 비하면 나는 정말이지 엄청나게 강한 사람이자, 그의 두려움이 되는 '人間'인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조의 이야기에 동감하고 때로는 요조의 태도에 가까워지는 스스로가 너무나도 두려운 '사람'이었다. 분명 나는 요조와 비슷한 면이 많지만, 요조에 비하면 나는 정말로 행운아다. 비슷한 이유로 상처받지만, 상처에 대한 해결책이 너무나 달랐다. 나의 경우에는, 순전히 운에 의해서, 요조와는 다른 방식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었다. 사람은 정말로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각자 자기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 없는 여러가지 조건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분화되어 나간다. 요조가 필연적으로 파멸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다자이 오사무가 다자이 오사무의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쩌면 순전히 우연과 유전적인 조건에 의해 결정되어 버린 걸지도 모른다. 내가 나인 것 또한 내가 자라온 환경과 나의 육체적 조건에 크게 좌우되어 버린 것 처럼..
세상에는 참 마음과 취향이 아름다운 사람이 많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외모가 아름다운 사람이 거리와 TV속에 그토록 많이 있다면, 설령 마음과 취향이 뇌의 생김새에 의해 결정되어 버리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우리가 눈으로 보는 아름다운 사람의 숫자만큼 마음과 취향이 아름다운 사람이 있을것이다. 하지만, 눈으로 보이기에 쉽게 인정받는 외면적인 아름다움, 근력에 의해 쉽게 알 수 있는 육체적 강함과 달리 내면의 아름다움과 장점을 지닌 사람은 그 축복을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더럽고 폭력적인 세상에 의해 마음의 괴롭힘을 당하다가 그 아름다움과 강함을 포기하게 되는 일이 많다. 그리고 죄많은 세상은 지속적으로 마음의 아름다움 따위는 지워버리고 눈에 보이는 장점을 얻으라고 강요한다. 모두가 참 힘들게도 그 강요에 자발적으로 복종한다. 당연한 듯이 아름다운 정신인 착한 마음, 남의 아픔을 같이 느끼는 마음을 경멸한다. 착하다는 말은 더이상 칭찬이 아니다. 칭찬인 줄 알면서 듣고도 찝찝한 그런 말이 되어버렸다.
소설의 맨 마지막 문장은 아름다운 소설의 끝을 장식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깊은 울림을 주면서, 주인공 요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힌트를 주고 있다. 「私たちの知っている葉ちゃんは、とても素直で、よく気がきいて、あれでお酒さえ飲まなければ、いいえ、飲んでも,……神様みたいないい子でした(우리들이 기억하는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남을 생각할 줄 알고, 그 술만 안마시면, 아니, 술을 마셔도 ... ... 하느님처럼 착한 아이였어요. ,p.155,新潮社)」..,요조는 도덕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렇지만 착한 사람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 착하다는 형용사도 참 애매한 말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분명한 건, 요조는 필사적으로 罪(죄)의 antonym(對語)를 찾았다는 것이다. 죄에 민감한 요조의 모습을 보고 친구인 堀木는 요조에게 예수쟁이(ヤソ坊主)같다고 말한다. 이런 요조가 착한 사람이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착한 사람은 죄에 민감한 사람이다.
「きっと不幸な人なのだ、不幸な人は、ひとの不幸にも敏感なものなのだから(분명 불행한 사람인 것이다, 불행한 사람은, 다른사람의 불행에도 민감한 법이니까, p.138,新潮社)」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했다. 다자이 오사무도 같은 현실을 보고 있다. 나도 일찍이 알고 있었다. 나같은 사람마저 알고 있었던 것이니까 모두들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는 건 언제나 쉽지 않고, 세상은 도무지 부끄러움을 모르는 바보와 '타인'들에 의해 재미있게 돌아간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뒷전이다. 뜻밖에 운이 좋아서 세상이 원하는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불행히도 공평하지 못한 대접에 벌벌 떨어야 한다. 타인을 두려워 하고 작은 친절에도 감사하게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대부분은 자기 나름의 방어기제를 구축하고 어른이 되어가지만, 심하게 상처를 입고 볼품없고 조그맣게 되어버리는 영웅들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세상이 원하는 것을 갖추고 있는 것은 어쩌면 죄의 근원이 되고 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예민하고 다른사람의 사랑과 믿음을 얻고자 노력하고 노력했던 소설의 주인공 요조 또한 '죄'로 스스로를 더럽히고 말지만, 그는 그것이 더러운 것이란 것을 알았고 그러기에 더욱 깨끗하게 파멸해 버렸다. 그러나 세상의 신나고 섹시한 주류는 요조와 비교해서 하나도 더 나을게 없을 만큼 죄를 저지르고 남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그저 행복할 뿐이다. 세상의 제멋대로인 기준으로는 그러한 '갖춘 사람들'의 죄는 죄가 되지 않기에 그들은 더욱 심한 죄를 저지르고도 편하게 살아갈 수 있다. 세상은 분명 불공평한 곳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마음이 가난한 쪽이 낫다. 적어도 알고도 죄를 짓는 일 따위는 피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괜한 상처를 주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요조에게 공감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 더 낫다라고 말할 수 없고, 아마 대부분 요조에게 공감하는지 여부와는 거의 관계없이 세상에 의해 더러워져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역시 요조에게 공감할 수 있는 사람, 인간실격이라는 말에 가슴 아파하며 스스로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들 쪽을 보며 웃고 싶다. 가만히 있어도 신나는 잘나가는 사람들은 내가 챙기지 않아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매일매일 웃어주고 잘해 주고 행복하게 해준다. 나까지 나서서 그들에게 다른사람도 여러번 말해 주었을 칭송을 반복해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자기가 받아본 푸대접이 가슴아파서 다른 사람에게 푸대접하지 않는 사람이 좋다. 못생기고 약해보인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났지만 용기가 없어 반박하지 못하고 힘없이 웃어버린 경험이 있어서 다른 사람 외모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좋다. 돈이 없어서 쩔쩔맨 추억에 다른 사람이 돈이 없다고 박정하게 굴거나 놀리지 않는 사람이 좋다. 그런 것 한번 경혐해 보지 못한 주제에 쿨한 인생을 논하는 사람들이 우습다.
소설의 결말은 읽기도 전에 알고 있었지만, 나는 끝까지 요조를 응원했다. 내가 생각하는 통쾌한 결말은 요조가 안정을 찾고 자신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을 지키면서도 결코 타협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흔들릴 필요가 없는 요조가, 자기와 같이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다른 사람들의 내면을 이해해 주고 다독여주는 사람이 되어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같이 마음이 유난히 가난한 세상의 찌질이들이 파멸이 아니라 새롭고 다정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왜 다들 파멸해 버리는 것일까.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수 밖에 없었으며, 반드시 죽음을 선택하실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어쩌면 다자이 오사무가 생각한 대로, 완전한 거부만이 가장 온전하고 정직한 비타협이자 최고의 항의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가 꿈꾸는 그런 일은 정말 꿈에 불과한 걸지도 모른다.
<이토 준지가 새로이 각색한 만화 인간실격 리뷰는 아래 링크 참조>
2023.02.13 - [Book Reviews] - 만화 인간실격 by 이토 준지 (伊藤潤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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