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의 힘은 위대하다. 결국 유명한 걸로 유명해지는 단계에 까지 오르면, 결국 그 자체만으로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 같다. 사람들이 반응하는 문학이란 무엇일까, 이런 궁금함에 이 책을 집어들게 되었다.
사실 베스트셀러를 폄하하는 의견도 많다. 하지만 나는 예를 들어 '미움받을 용기 (기시미 이치로, 코가 후미타케)' 라던지, '칼의 노래 (김훈)' 이런 베스트셀러도 거의 맨 마지막으로 사서 읽어 보곤 했는데 의외로 괜찮았다. 나 또한 베스트셀러는 오히려 피하는 성격이라 아직도 '7년의 밤 (정유정)' '언어의 온도 (이기주)' '불편한 편의점 (김호연)' 등은 아직 손을 못대고 있지만, 역시 언젠가는 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 '아몬드'는 감정표현불능증(알렉시티미아, alexithymia)를 가진 10대 소년의 이야기이다. 감정표현불능증은 뇌의 부위 중 편도체가 정상 크기보다 작을 때 발생하는 증상이라고 하는데, 아몬드 모양의 편도체 부위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해서 감정을 거의 못느끼게 되는 증상이라고 한다.
이 소년 - 주인공 선윤재 - 는 이러한 감정표현불능증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보통 이들과 다르게 몇가지 죽음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또 아주 특이한 사람들을 만나 상호교류를 하게 된다. 주인공 소년은 이미 여섯살 무렵에 학폭으로 몰매를 맞아 골목길에서 죽은 소년의 마지막 모습을 목격하고, 이를 슈퍼 주인에게 알리는 경험을 갖는다. 또 고1이 되기 직전에 끔찍한 흉기 난동 살인 사건으로 가장 아끼는 사람들이 눈 앞에서 죽고 다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후 이 주인공이 맺는 인간관계에서 두 명의 성인 남성 어른이 등장하는데, 둘 다 부인과 사별을 하고 이 경험이 주인공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소설에서는 이토록 다양한 죽음이 등장하고, 주인공은 이 모두에 제대로 반응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주인공은 이들의 죽음 후에 새로이 만나게 되는 또래 친구들과, 위에서 언급한 성인 남성 둘의 도움으로 서서히 스스로에 대해 더욱 잘 이해하게 되면서 한편으로는 본인의 문제인 감정표현불능증을 기적적으로 극복하게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소설을 읽으며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거꾸로 내가 감정표현불능증인가?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주인공의 반응이 사실은 감정표현불능증을 충실하게 상상하였다기 보다는 그저 착하지만 조금 무딘 아이를 마음대로 상정하고 그린 것에 불과한 것 같았고, 감정이 빠진 인간의 섬뜩함보다는 약간 낙관적인 AI 탑재 휴머노이드 같은 인상이어서 상상력이 불충분한 것 같았다. 주인공 주변에 나타나는 두 명의 성인 남성과, 이 주인공의 친구가 되어 주는 두 명의 또래 친구들도 너무나 개연성이 떨어졌다. 주인공은 설정상 가정환경이 유복할 수가 없고, 또 감정표현불능증으로 학교에서도 약간 경원시되는 캐릭터이지만, 생활고가 주는 상처는 단 하나도 제대로 묘사되지 않았고, 사람들은 이 소년에게 자발적으로 다가와 관심과 사랑을 공짜로 준다. 물론 주인공이 워낙 감정표현불능증이기에 가난하고 힘든 상황에서 인간이 받는 상처를 일체 느끼지 못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세상에는 워낙 특이한 것에 관심을 가지며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런 주인공에 측은지심을 느껴 손을 내미는 사람이 무려 성인 남자 둘 (심지어 둘다 번듯한 대학교수급 사람이다. 한명은 심장외과 교수였으나 은퇴 후 빵집 경영, 한명은 현직 경영대학 교수. 둘 다 설정상 상당한 부를 소유), 10대 소년 하나, 10대 소녀 하나, 다 합쳐 총 4명이나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거꾸로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계급과 한국 사회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가치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이 선윤재라는 주인공 소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득력을 가진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거기에 대해 탐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선윤재 소년의 어머니는 설정 상 나름의 대졸 엘리트 여성이지만, 엄청 미인이고, 늙어도 늙은 티가 나지 않는 약간 행운의 미모를 가진 여성이다. 그래서 그녀는 여대 앞에서 악세사리 좌판을 하는 남자와 결혼했지만, 그 선량하기만 한 남자는 차에 치여 죽고 말고, 일종의 장애를 지닌 아들만을 남긴다. 여기서 등장하는 주인공 선윤재 소년의 외할머니 - 이 분은 대표적인 여장부 스타일의 노인이다 -와 어머니가 결국 이 윤재를 맡아 키우게 된다. 아, 전형적인 걸크러시의 시작이다.
뿐만 아니라 주인공 소년의 미인 어머니는 무려, 헌책방을 운영하여 가계를 꾸린다. 나는 무슨 컨셉 독립서점도 아니고 헌책방이 그렇게 무난한 가계 운영을 허락할 만큼 장사가 잘 된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서점 자체도 잘 안되는 마당에... 그러나 이러한 낭만적인 공간을 운영하는 '미인' 어머니는 늘 왠지 몰라도 늘 단골이 있고 나름 성실하고 꿋꿋이 가게를 멋지게 운영한다. 내가 현실에서 만나는 헌책방은 모두 50-60대 이상의 노년이 되어가는 중년 이상의 남자들이 힘겹게 운영하거나, 아니면 알라딘이나 yes24 같은 이미 기업화 된 곳들 뿐인데, 참으로 80년대 90년대같은 상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예쁜 사람'과 구차하고 힘든 현실에 대한 고민이 없는 '낭만적 예쁜 공간'으로 상징되는 외모(외관)지상주의... 의 그림자를 느꼈다.
아마 어머니가 이뻤으므로, 미신적인 유전 '속설'을 따지자면 주인공 선윤재 학생의 외모도 아마 책 표지의 주인공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훈남일 것을 상정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주인공은 그저 무덤덤하고 쿨하게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 이외에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특징' 때문에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덤덤히, 문법에 맞고 사리에 맞는 말만 읊조리며 쿨하게 살아간다.
아마 이 주인공은 번듯한 외모에 쿨한 태도로 조용히 학교를 다니는 10대 훈남을 상정하며 그려져 있는 것 같다. 그렇기에 이 주인공에게 친구로서 다가오는 캐릭터들이 문제 투성이의 일진 후보 남학생과, 학교에서 외로이 무려 홀로 육상부를 한다는 신비의 매력 넘치는 소녀인 것이다. 그리고 이 소녀는 이 주인공에게 먼저 기습 키스를 하기도 한다.
이쯤 되면 나는 상상력의 부재,라고 해야 할까, 전개의 놀라움 또는 특성을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 드라마나 영화가 엄청 발전하고 있어도, 여전히 우리 소설은 2000년대 초반의 드라마나 영화의 감성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클리셰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 사회의 문학 예술 작품 (소설, 드라마 대본, 영화 시나리오 포함)의 상상력이 너무 도식적이고, 사회 내의 일정 지위에 오른 계급만을 우상화하여 과대 대표하며, 결국 우리 사회의 현실적 괴로움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있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게 아닐까? 왜 그렇게 되는지는 몰라도 갑자기 나타난 부유한 사람들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 기초 생활 수준을 유지시켜 주고, 그렇게 만들어진 카드의 집같은 취약한 평화 속에 외모가 그럴듯한 사람들이 특별한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가벼운 상처와 가벼운 문제를 침소 봉대 하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갓생(이것 저것 이벤트와 사랑과 우정으로 가득한 인생)을 산다. 도대체 이게 2020년대 대한민국인가? 나는 정말 모르겠다.
이 소설의 리뷰를 보면 찬양 일색이다. 하지만 나는 이 소년의 성장기를 읽는 것보다, 차라리 2023년 넷플릭스에서 릴리스된 드라마 '더 글로리'를 열심히 보고 동은이가 복수의 화신으로 흑화하는 과정과 그 노력의 의미를 생각해 보거나, 아니면 연진의 남편으로 나오는 하도영의 태도를 학습하는 것이 생존과 개인 발전에 훨씬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을 읽으며 '유명한 것으로 유명해지는' 대한민국의 문학 현실과, '진짜 무섭고 잔인한 것 현실을 상상할 줄 모르는' 상상력의 부재, 그리고 이 상상력의 부재를 촉진하는 걸크러시 클리셰와 외모지상주의 클리셰를 다시 한 번 반성해 보았다.
글쎄, 소설 말미의 작가의 후기를 읽어 보았을 때 작가는 결국 이 소설을 통해 어떤 화목하고 유복한 세상의 따뜻함을 전달하고 싶고, 과학적으로 주어진 한계 (이 경우 편도체 미발달로 인한 감정표현불능증)도 인간의 사랑으로 극복되는 것과, 그러한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소년의 성장 과정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이 소설을 읽는다면 뭐, 얼마든지 그런 성장소설로 읽어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내가 학창 시절에 수업 과제로 이 소설의 독후감을 쓰라고 했다면 그리고 그렇게 쓸 수도 있다. 웹 상에 널린 찬사와 함께. 하지만 그게 진짜 소설 감상일까?
그래도 나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한 권이었다. 권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많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하여 기록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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