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한 역사서이지만 간만에 매우 흥미롭게 읽은 책이다. 저자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는 성균관대와 도쿄대학교의 명예교수이자 (2014년에 이미 정년퇴임을 하였다), 조선 후기의 경제사에 대한 전문 연구자로 잘 알려져 있으며, 한국어에도 매우 능통한 사람이다.
이 책은 한국, 중국, 일본의 역사를 볼 때에는 일국사의 관점에서 보는 것보다, 이들을 함께 비교해 가며 보았을 때 더욱 깊은 이해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 책은 1부 통사: 전의 성숙과 새로운 시대로의 항해, 및 2부: 주제사: 동아시아의 새로운 이해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부 통사 부분에서는 시간의 순서에 따라서 전체적인 흐름을 잡아주고, 2부 주제사 부분에서는 여러 주제, 특히 농업 경제적인 부분과, 사회 구조적인 부분을 중심으로 한중일의 15~19세기 역사를 비교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것은, '주자학'에 대한 오해가 한국 뿐 아니라 일본에도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이었다. 나 역시 주자학 하면 주자가례를 중심으로 한 허례 허식과 이기론(理氣論)을 중심으로 한 탁상공론적 근본주의 유교 철학의 이미지가 강했는데, 군권과 신권의 철저한 분리, 신분제의 철폐, 관료 선정에 있어서의 능력 주의 도입의 근본 사상이 되었다는 것은 정말 몰랐다. 특히 주자학이 한국과 중국에서 널리 실시되어 신분보다는 능력 중심의 인재를 선별하고, 특유의 안정적인 중앙 집권을 가능케 했던 과거 제도의 최대 사상적 근거가 되었다는 것 역시 흥미로웠다. 무엇이든 변질 되기 전에 최초 사회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때에는 그 본질적 매력이 있었을 터인데, 그것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감정적인 반응과 인식에 치우쳤던 스스로를 반성해 보았다.
한편으로, 역사와 사회를 인식함에 있어 경제의 중요성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 번 느꼈다. 물론 지정학이나 외교, 군사, 정치적 관점이 큰 줄기를 정하기도 하고, 우리의 역사 교육은 그런 관점에서 서술되어 있지만, 사실 지정학은 그렇다 치더라도 외교, 군사, 정치적 관점의 역학관계를 정하는 또 하나의 축은 기술 및 제도의 발전과 그로 인한 경제적 효과라는 점을 잊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부분은 정말 낯설었다. 한국, 중국, 일본의 전통 왕조가 어떻게 농지를 파악하고, 어떻게 세수를 확보하였으며 이것이 지배층과 피지배층 (주로 농민)의 특징을 어떻게 형성해 나갔는지를 자세하게 풀어나가는 저자의 관점을 보면서 그 동안 이런 관점에서 역사를 이해하려는 것이 정말 부족했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행동경제학에서 말하는 '서사의 오류 (敍事의 오류 narative fallacy)' 라는 것이 있다. 서사적 오류는 일련의 데이터나 사건 사이에 실제 연관성이 없는 경우에도 일련의 데이터나 사건을 중심으로 스토리나 내러티브를 만들도록 유도하는 인지적 편견을 뜻한다. 이로 인해 우리는 불완전하거나 부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잘못된 결론이나 가정을 하게 될 수 있다. 역사의 이해와 해석에 있어서, 우리는 자꾸만 특정 인물이나 사건 중심으로 내러티브를 만들어 가는 문제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닌지 계속 생각해 보게 되었다. 실제로는 그 인물이 대두하게 되거나, 특정 사건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경제적 원인이 존재함에도 이에 대해서는 신기할 정도로 무지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울러 조선이 되었든, 막부 일본이 되었든, 또 명나라나 청나라, 류큐, 베트남의 역사를 인식함에 있어서도 한 나라의 입장에만빠져서 특수성을 주장하는 것의 어리석음과 위험함 또한 새로이 배울 수 있었다. 지금처럼 교류가 활발한 상황은 아니더라도, 분명히 서로 지대한 영향을 주고 받은 인접 국가나 주요 타국과의 비교 없이, 무조건 적으로 자기 나라만 보면 필연적으로 본인들만 특별하다거나, 쓸데없이 마치 우리 것만 유구하고 합리적인 전통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편협하고 국수적인 시각에만 사로잡히게 된다. 아울러 이러한 비교 없이 아예 서구적 역사 발전을 억지로 동아시아의 역사 발전에 꿰맞추려고 하는 시도의 무상함 역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실제로 이 책에서 '쇄국'이라는 말이 사실은 일본어이고, 원래 일본의 막부에서 자기 인식을 위한 말이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현재에 이르러서는 마치 구한말의 조선 / 대한제국의 자기인식 및 현실을 규정하는 대표적인 키워드로 사용되고 있는 점을 보면서, 우리의 역사 인식이란 것이 얼마나 타국에 의해 크게 영향 받기 쉽고, 또 오염되기 쉬우며, 와전되기 쉬운지를 곱씹어 보았다. 당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여러가지 이유에서 비단 조선 뿐 아니라 막부 일본이나 청나라도 일종의 '쇄국'을 정책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그 '쇄국'의 실질에 있어서 조선은 완강하고 완전한 통상 거부와, 실효적이지 못한 대응으로 끝났다면, 일본은 오랜 '난학'의 존재에서 볼 수 있듯 사실상 통제된 수용이었고, 청나라의 경우에는 러시아와의 국경 협상, 아편전쟁 등을 통해 실질적 전쟁, 침략 위협으로서 서방을 인식하고 있었기에 대치 관계에서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점을 살펴 보면, 그 후의 전개와 결과를 좀 더 깊이 음미할 수 있다.
“덧붙여 전술한 조선의 통상 거부의 상태를 일본과 마찬가지로 ‘쇄국’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하는 사례를 교과서나 연구서에서 종종 볼 수 있는데, 조선에 ‘쇄국’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쇄국’이라는 자기 인식 자체가 일본의 고유한 것이었다는 점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야지마 히로시, <한중일 비교 통사> (151쪽)
과연 근대란 무엇인가, 봉건이란 무엇인가, 또 자본주의의 맹아론 같은 것은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일까? 다양한 질문을 해 볼 수 있다. 어쩌면 역사란 필연적인 발전과정이 존재한다기 보다는, 특정 자연적, 지리적, 사회적, 외교적, 경제적 조건이 갖춰진 상황 속에서 각 집단이 생존과 존속을 위해 벌이는 다양한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는 그런 사례집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경영학의 시각이 역사 인식에 있어서 기여할 수 있는 부분도 많을 것 같다는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솔직히 어려운 책이고 다소 학술적인 성격이 강한 책이었으나, 상당히 지적으로 자극적인 책이었다. 저자는 일본 출신의 일본인 학자이지만, 일본에서는 상당히 진보적, 친한적인 지식인 (다소 좌파)으로 구분되어 있으므로 역사 인식 면에 있어서 국내 독자들도 쉽게 수용할 수 있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편견을 가지지 말고 꼭 한 번 일독하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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