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근대화와 제국으로의 부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단편적이다. 원래는 조선처럼 답답한 전근대 사회였던 일본이 갑자기 일군의 애국지사, 개화주의자들에 의해 메이지유신을 하여 각성한 후 빠른 서구 문물 도입을 성공시키고, 군대를 강화하여 제국주의 침략에 동참했다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조선은 왜 근대화를 이루지 못했나를 갑자기 아쉬워 하면서 조선의 근대화를 막은 주범으로 고리타분한 유교를 지적하며, 이 유교가 너무 뿌리깊게 자리 잡아 쇄국의 족쇄를 채워 버렸기에 조선이 근대화에 늦었고 그 결과 일본의 침략을 받아 망국에 이르렀다는 것이 아마 일반적인 사람들의 인식일 것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인식은 큰 틀에서도 아주 잘못되어 있다. 일본사를 연구하는 박훈 교수가 10여년전인 2014년에 쓴 이 짧고 흥미로운 책은, 이런 인식을 바로잡고 우리가 인식하는 역사의 의미와 진실에 대해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해 주는 책이다.
(1) 일본 역시 조선과 비슷한 전근대 사회였나
먼저 일본이 조선처럼 답답한 전근대 사회였다는 관점부터 살펴보자. 사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저작과 유튜브 프로그램, 다큐멘터리를 통해 이제는 잘 알려져 있지만, 일본은 전혀 답답한 전근대 사회가 아니었다. 쇄국은 하고 있었을지언정, 상공업이 발달하고, 네덜란드와의 제한적인 교류를 통해 발전한 난학의 렌즈로 서구를 꽤나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강력한 막부가 중앙집권의 성격이 강한 봉건 체제를 안정화 시키며 일본은 250년에 가까운 평화 속에서 꽤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나라가 부패와 가난으로 심각하게 무너지기 시작한 조선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주요한 변화는 바로 사무라이 계급의 변화와 일본 주요 도시의 '도시화'이다. 사무라이 계급은 예전과 달리 이제 전문적으로 전투를 수행하는 조직 및 계급이 아니게 되었다. 평화 속에서 이들은 각 영주들의 리(吏, 즉 하급공무원)가 되어 회계, 사무, 행정 등을 담당하는 약간 하급 공무원 같은 것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농사를 짓지 않았으므로 농민도 아니었다. 도시에 거주하면서, 도시로 공급되는 물자에 의존하는, 즉 상공업에 의존하는 도시거주민 중 중간계급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거주하는 일본 각 번 (영주 -즉 다이묘- 가 지배하는 땅)의 주요 도시에는 상업으로 성공한 상인들이 존재했고, 사무라이들은 이 상인들에게 돈을 빌리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생활수준의 차이, 즉 부의 차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약간 눌려 지내는 위치에 있어야 했다. 사무라이들은 상인보다 신분은 높지만, 돈이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만성적인 생활고와 불만 (frustration)을 느끼며 언제든 폭발할 위험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은 여전히 칼을 휘두를 줄 알았고, 또 그 수도 많았다. 이런 특수 계층은 비단 지방의 주요 도시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중앙 집권을 하고 있는 막부 역시, 사무라이들의 정권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막부 내부에서도 이 모순과 불만은 꿈틀대고 있었고, 사무라이층의 동요는 평화로운 일본의 상공업이 발전해 가고 국부(國富)가 증가할 수록 더욱 커지고 있었다.
(2) 유학은 과연 근대화의 걸림돌이었나
여기서 또 하나 이 책의 저자가 이야기 하는 것이 바로 '유교'의 역할이다. 정확히는 문화와 관혼상제적 관습의 의미를 뺀 '유학'의 역할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들의 일반적인 인식 하나가 또 무너진다. 바로 불만에 가득차 있던 이들 사무라이를 각성시킨것은 엉뚱하게도 '유학 열풍' 이라는 것이다.
조선통신사와의 교류 및 조선과 명,청으로부터 서적 구입 등 유학의 직접 도입을 실시하며 일본에도 유학이 전파되기 시작된다. 유학은 근본적으로 논어에 나오는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군주의 일과 신하의 일 등을 명확히 나누어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임금이 임금답게, 즉 군주가 제대로 된 왕도를 택하여 나라를 직접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며, 이렇게 군주가 직접 왕도에 따라 정치를 펴지 않는 다른 체재를 일단 변태적 체제로 부정하고, 문제가 발생한다고 정의한다.
그리고 신하의 일은 군주가 왕도를 따라 제대로 천하를 다스릴 수 있도록 간언하고, 우국과 충정에 따라 바른 정책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즉 단순히 공무원으로 일을 하는게 아니라, 정치에 적극 참여하고, 군주에게 간언하여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정도전이 조선 건국시 꿈꾸었던 신권 정치를 떠올려 보라.
유교가 일본 내에서 대유행 하면서 원래 리(吏, 즉 공무원)에 불과했던 사무라이들은 사(士, 유교의 선비)로 각성했다. 이제 그들은 단순히 거세된 무장들이 아니라 칼을 찬 선비가 되었다. 이들은 정치에 참여하고자 했고, 군주에게 간언하여 일본을 제대로 된 나라로 만드는 것에 적극 동조하고자 했다. 이들의 유학적 사상무장은 에도 막부의 최고 권력자 쇼군의 정체성을 묻게 만드는 것으로도 이어졌다. 즉, "쇼군은 군왕이 아니면서 무슨 근거로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하고 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인가?"를 묻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교토에 갖혀있는 군주인 천황이 직접 다스리고, 사무라이들은 이 천황에게 간언하고 보필하며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의식이 싹트기 시작한다.
한편, 일본이 이런 변화를 겪고 있는 상황 속에서 조선과 청나라에서는 정치 체제와 사회 체제의 모순이 극도로 첨예화하며 중세 및 근세의 유교적 정치체제가 갖추고 있던 나름의 순기능마저 완전히 거세화된다. 특히 조선에서는 붕당정치마저 무녀져서 이젠 '세도정치' 라고 하는 족벌 하나가 국정을 좌지우지 하고, 왕은 나무꾼 출신 철종이 즉위한 이후 거의 꼭두각시 화 되어 버리는 막장 체제로 진행되어 간다. 오히려 유학은 사라지고 유교만 남아 엉뚱한 인습과 허례허식만 남고, 유학의 장점은 완전히 붕괴된 형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른바 탈레반화이다. 이러한 면을 본다면, 조선왕조의 멸망은 유학이 원인이 된게 아니라 오히려 유학이 의미를 완전히 상실해 버리고 기능을 못하게 된 면에도 원인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실제 이 시기 조선은 상소도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았고, 안동 김씨, 풍양 조씨의 족벌 독재에 제대로 견제조차 하지 못한 채 국가 전체가 한 가족의 사유화가 되어간다. 마치 북쪽의 김씨 조선 처럼 말이다.
(3) 메이지유신은 기득권 (=에도막부) 내부의 호응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사실 이 점이 바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이다. 당시 세계에 있었던 비 서구권 제국들, 즉 오스만투르크, 청제국, 무굴제국 등등이 모두 하나같이 서구화와 근대화에 실패했는데, 어떻게 일본만이 이것이 가능했는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대답이 아닐까 싶다.
메이지유신은 어떤 의미에서 일본 서남부의 규슈와 규수 바로 옆에 있는 현재의 야마구치현을 중심으로 한 세력에 의한 쿠테타라고도 볼 수 있으며, 이들 규슈 해적 세력에 의한 본토 강점(강제점령)이라고도 볼 수 있다. 왜구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본토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던 이들 사츠마, 죠슈번은 멀리 떨어져 있었고 나름의 독특한 지역적, 역사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기에 본토에 대항할 확고한 구심점을 갖출 수 있었고, 막부의 통제를 살짝 비껴나가 아주 빠르게 신문물을 흡수하며 자체 무장을 도모할 수 있었다. 이들이 바로 존왕양이와 부국강병등의 논리를 내세워 유교적 명분을 바탕으로 교토의 천황을 옹위하고, 이 기세로 에도로 쳐들어가 에도의 쇼군에게 대정봉환, 즉 정권을 천황에게 (사실은 규슈 세력인 자신들에게) 넘기라고 당당히 외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바로 사카모토 료마, 이토 히로부미, 요시다 쇼인, 사이고 다카모리 등등의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아무리 깨어 있었고 신식 문물과 무기로 무장했다 한들, 에도 막부에서 각 잡고 토벌전을 펼쳤다면 이들의 유신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그건 매우 어려웠을 것이고, 설령 이겼다 한들 엄청난 내전을 겪으며 일본 역시 피폐해졌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도쿠가와 막부의 중심부 역시 사무라이들로 이루어져 있던 만큼, 막부 내부에서도 유학에 대한 유행과, 선비가 된 사무라이의 간언과 정치참여로 외부 문물 도입을 통한 부국강병을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나름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버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메이지유신은 아주 빠르게, 그리고 최소한의 전투만을 거치며 사실상 큰틀에서 평화적으로 정권이양이 이루어졌으며, 사실은 도쿠가와 막부가 신세력에게 정말로 아주 스무스하게 정권이양을 해 주었다는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바로 기득권 내부에서의 호응과 협력이 메이지유신이라는 엄청난 변혁을 성공시키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청나라와 조선의 경우 이 기득권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개화와 변혁을 방해했는지 우리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일본에 대해 공부를 하면 할 수록, 정말 우리가 얼마나 일본을 피상적으로 또 대충 우리 마음대로 해석하여 인식하고 있는가를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이는 결코 일본이 무조건 우월하고, 일본은 너무 잘나서 무조건 잘 될수 밖에 없었다라고 하는 멍청한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이 성공했을 때나 또 실패했을 때나 진짜 왜 성공했고 실패했는지를 제대로 모르면서 그냥 우리 입맛에 맞추어 마음대로 해석하고 있지 않냐는 이야기이다. 이건 비단 일본 역사를 볼 때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닐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 스스로의 역사를 해석하거나 연구할 때에도 이런 유치한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간만에 지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책을 읽어서 기뻤다. 앞으로도 조금씩 일본의 메이지유신 즈음에 관한 역사를 좀 더 제대로 살펴 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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