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한산성을 보기 위해서 원작인 이 소설을 찾아 읽었다. 도서관에 신청을 넣고 오래 기다려 드디어 책의 첫장을 펼쳤을 때부터, 나는 이 소설이 매우 아름다운 작품일 것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문장 하나 하나가 아름답게 살아 있었고, 춥고 절망적인 정묘호란 시의 겨울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소설의 인물들은 개성적이고 실제 살아 있는 사람들 같았다. 역사에 근거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허구인 소설인데도, 마치 그 때 실제 살아 있었던 사람들을 그대로 문장으로 옮겨 놓은 것과 같은 생생함이 있었다.
조선은 힘이 없고, 망해가는 회사처럼 무기력한 상황이었다. 청나라는 강했고, 그들은 떠오르는 해처럼 활기차고 효율적이었다. 조선의 조정은 남한산성 안에서 주전과 척화로 나뉘어 고민과 갈등에만 빠져 있었다. 답답했고, 추웠고, 두려움에 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루하게 자존심을 세우고 최대한 체면을 차리고 그럴듯하게 살아남고자 했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의 실력을 목도하면서도 그들을 야만이라 일컫고 스스로를 적보다 고귀한 존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조선의 백성들은 무력하고 명령에 따랐지만 속으로는 그들을 다스리는 지배자들의 모순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도륙하고 고향을 침범하는 북방의 이민족들에게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패배가 정해진 무의미한 전쟁과 삶과 죽음이 외부의 조건에 따라 아무렇게나 결정되어 버리는 부조리한 상황, 그것이 남한산성에 틀어박힌 조선의 왕과 사대부, 그리고 그들이 다스리는 성안의 백성들의 현실이었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은 또다른 남한산성일지도 모른다. 물론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렵다. 우리 사회는 조선만큼 약하거나 무력하지 않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적어도 추위와 전쟁 속에서 언제 죽게 될지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인생의 장면에서 그것이 일이나 학업이 되었든, 개인적인 인간관계가 되었든, 스스로의 어리석음과 무능함, 그리고 외부 상황의 불리함으로 인하여 남한산성에 갇혀버린 조선 조정과 조선 백성과 같은 처지에 속하여 절망 속에서 공연히 생각만 어지럽히고 육체와 영혼을 좀먹는 상황에 처하는 경험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과연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우리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환상과 생각 속에서 어디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를 돌이켜 보아야한다. 김훈의 아름다운 소설 남한산성은 우리에게 슬프고 괴로운 남한산성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주면서 우리가 그러한 딜레마와 역경에 조금이라도 현명히 대처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고 또 위로한다.
남한산성 소설의 이야기를 교훈적으로 해석하자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미화해서는 안되고, 절망의 원인을 우리의 나약함에서 찾아 반성하는 작업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어려움을 해결해 나가면서, 상황과 타인의 현실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어려움을 통해 배워야 한다는 다짐을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결국 갈등을 거듭하다 항복을 선택한 인조의 마음, 스스로의 무능을 뼈저리게 깨우치면서도 살았음에 안도하는 사대부들, 어찌되었든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채 과거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음에 기뻐하는 평범한 민초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어쩔수 없는 우리의 나약함과 평범함에 복잡 미묘한 감정을 느끼며 위로를 받을 수도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이렇듯 한심한 걸 알면서도 꾸역 꾸역 살아가듯이, 과거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삶을 살았고 또 그 와중에 엄청난 굴욕을 겪고 마음의 상처를 받으면서도 어찌 되었든 잘 살아 나갔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한없이 강하고 철저하게 보였던 청나라 역시 긴 역사 속에서 결국 쇠락의 길을 걷고 말았다는 것... 이 모든 것이 결국 하나의 커다란 위안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루함을 벗어나는 것은 사실상 엄청난 노력과 비범한 의지가 없는 한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 역시 슬픔이자 또 하나의 현실임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다.
수많은 실패와 게으름, 어설픈 깨달음과 무모함으로 점철된 인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 서날쇠의 대장간처럼 우리의 삶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매일 매일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우리에게 시간이 주어지고, 햇볓이 주어지고, 무언가를 배우고 느낄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쉽게 망각한다. 남한산성 이전의 삶, 남한산성에서의 47일도 삶이지만, 남한산성 이후의 삶 역시 우리가 짊어져야 할 삶이다. 후회에 매몰되거나 현재의 고통을 너무나 크게만 여기지 말고 언제나 내일을 그리며,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어 나가 보겠다고 다시 한 번 용기를 내 보는 것, 어쩌면 그러한 자극이야말로 감각이 마취된 우리들에게 이 훌륭한 소설 작품이 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감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2017.11.8.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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