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1961년에 쓰여졌기 때문에 아쉽게도 내 나름의 '고전' 카테고리에는 넣을 수 없었다. '고전'에는 출간된지 100년이 넘은 책들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이 주는 감동과 위로, 그리고 교훈은 정말로 압도적이다. 이 책이 앞으로 수십년을 더 버티고 100년을 넘기는 책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 이순간, 이 소설의 무게와 가치는 여전히 찬란하다. 혹시 누군가 진지하게 소설을 읽고 싶어 하는 사회 초년생 독자가 있다면,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과 함께 이 '캐치-22'를 추천해 줄 것이다.
1969년에 쓰여진 Kurt Vonnegut의 명작 Slaughterhouse-Five (제5도살장)와 비슷하게, 이 책 또한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전쟁 속에서 모두가 그야말로 미쳐가는 부조리를 경험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풍자와 유머를 통해 생생히 보여준다. 이 캐치-22를 읽는 동안 나는 10년 전 쯤 읽었던 Slaughterhouse-Five를 계속해서 떠올렸다. 그러나 이 두 소설은 확실히 다르며, 나는 둘 중에서 캐치-22 쪽이 더욱 감명 깊게 느껴졌다.Slaughterhouse-Five는 좀 더 반전의식이 강한 소설이고 그 안에서 파괴되고 왜곡되는 인간성에 포커스를 맞춘 작품이라면, 캐치-22는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는 인간과 인간이 만든 조직이 벌이는 부조리를 아주 생생히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내 스스로가 나이를 먹으면서 현실의 부조리를 실제로 겪고, 그 안에서 진지한 체 하면서 나 또한 부조리의 완벽한 구성원이 되어 가는 경험을 하였던 것이 캐치-22쪽에 더욱 깊게 공감하게 된 이유가 아닌가 싶다.
캐치-22는 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미공군 부대를 배경으로 하여 1942년 부터 1944년에 걸쳐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끝이 나지 않는 전쟁 속에서 장교와 사병들은 제각각 전쟁이라는 환경속에 적응하고 또 미쳐가며 살아간다. 제대를 달성할 수 있는 출격회수는 35회에서 40회로, 50회로, 70회로, 계속 늘어가기만 한다. 결국 수십여회의 출격을 하고도 제대는 요원하기만 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되어가는지도, 그 인생을 바꾸어 나갈 방법도 찾지 못한 채 감정의 과잉과 무질서 속에서 계속해서 하나 하나 죽어갈 뿐이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미쳐가고, 정체 불명의 Catch-22라는 규정이 실체도 없이 그들을 현실에 잡아 가두고, 부조리를 양산하기만 하며 황당한 상황을 지속시키고 악화시키기만 할 뿐이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구나 현실에 적응해야 한다. 그 현실이 미친 현실이라도, 그 안에서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매 시대, 어떤 사회, 어떤 조직에도 모순은 존재해 왔고, 때로는 캐치-22의 배경이었던 2차대전 말기처럼 그러한 모순이 최대한으로 증폭되는 순간도 있어왔다. 우리들도 학교, 군대, 회사, 가정 등에서 미쳐있는 현실과 마주해야 한다. 완벽한 순간이란 없다. 있어도 순간적이거나, 또는 완벽한 순간이라고 근거 없이 우리가 믿을 뿐이다. 미쳐있는 현실과 마주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 안의 미쳐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캐치-22는 바로 이러한 슬프고 황당한 현실을 너무도 생생하고 솔직하게 드러내 버린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요새리안을 비롯하여 제정신인 사람은 한명도 없다. 모두가 제각각의 방식으로 미쳐있고, 제각각의 방식으로 바보같고 추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되었든 전쟁은 우리가 역사책에서 보는 바와 같이 최대로 심각한 표정을 유지하며 아무런 문제없이 근엄하게 수행되고, 벌어질 일들은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벌어지고 또 수습되었다. 이것만큼 인간이 만든 사회와 역사를 신랄하게 풍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살고있는 현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 자신을 비롯해서, 결국 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미쳐있다. 각자의 방식으로 악랄하고 지랄맞은 것이 결국 우리들이다. 현실이 이처럼 힘들고 버거운 것도, 우리가 모두 각자 양태가 다를 뿐 서로가 각자 미쳐있고, 각자의 방식으로 아무렇게나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란 것을 직시해야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현실이 그래도 살만한 것은, 각자 그래도 이 와중에 살아가고자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고, 그래도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고, 또 과거의 실수와 실패로부터 배워나가며 조금씩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 힘들고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지만, 결국 우리는 그저 인생을 낭비하며 재미도 없는 희극(戱劇)을 대량생산하고 있을 뿐이다.
캐치-22가 단순히 풍자에서만 끝났다면, 결코 위대한 소설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 요새리안이 소설 마지막에 보여준 깨달음과 등장인물 Orr의 행동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미친 현실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일러주고, 생각하게 한다. 이 소설에서 생존하는 인물들 - 자본주의의 화신 '마일로 마인더바인더' 중위 나, 보신주의/출세주의의 화신 '캐스카트' 대령 등- 또한, 우리가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는지를 예시적으로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우리는 어찌 되었든 살아야 한다. 아름다운 삶이나 행복 또한 생존 해야만 얻을 수 있다. 생존을 위해서는 살겠다는 강력한 의지와 건강한 육체가 필요하다. 그러나 단순한 생존만을 위한 삶은 아름답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름답게 생존하는 것이 - 이것이 인간의 특권이자 차원 높은 행복의 전제조건이 될 수 있다면 - 중요하다면, 맑은 눈이 꼭 필요하다.
캐치-22가 멋진것은,이 점을 정말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일단은 살아 남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살아 남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약간의 용기만 갖추면 이 세상이 미쳐 있고 그것을 어떻게 탈피해 낼 것인가를 볼 수 있는 맑은 눈이 있어야만 인간으로서 정말 아름다워 질 수 있다는 것을 이 소설은 전달해 준다. 대부분은 맑은 눈만 갖추고 있어 현실에 좌절하고 시들어가거나, 강력한 의지와 건강한 육체만 갖추고 맑은 눈이 없어 자기가 미친 줄도 모른 채 아무렇게나 살아간다. 이 둘을 다 갖추되, 생존에 조금 더 비중을 두는 균형감각과 현실주의가 필요하다. 그것만이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는 첫걸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앞서 사회 초년생 독자에게 이 소설을 추천해 주고 싶다고 적었다. 순수함 (맑은 눈)을 포기할 필요는 없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생존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싶고, 이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이 만드는 조직과 사회는 언제, 어디서나 미쳐있으며, 나 자신 또한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꼭 말해주고 싶다. 모두가 죄인이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이러한 면에서 본질을 꿰뚫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 스스로만 예외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마음을 버리고, 모두가 미쳐 있고 모두가 단점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 삶에서 최대한 아름답게 살아 보는 것이 어쩌면 행복에 앞서는 인간 삶의 참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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