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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Learn Foreign Languages

외국어를 배우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열린마음을 가진 대화 상대의 존재

by FarEastReader 2019.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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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5 - [How to Learn Foreign Languages] - 중국어를 배우며 느낀 점(외국어 학습법 update)

위 글에서 말하려다가 말았던 사고실험(思考實驗)과 관련하여 오랫동안 고민하고 있던 문제를 정리하여 보았다.

 

<외국어를 배우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열린마음을 가진 대화 상대의 존재>

 

Pixabay로부터 입수된 Aline Dassel님의 이미지 입니다. 

 

외국어 학습에 있어 한가지 생각을 공유해 보려고 한다. 오랫동안 외국어를 공부하면서 늘 고민스러웠던 점 중 하나는, 어째서 모국어 화자는 정규 교육을 받지 않거나 접촉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극히 제한된 경우에 처해 있어도 자연스러운 언어 습득이 가능한데, 어째서 외국어습득을 하는 사람은 심지어 해당 외국어가 사용되는 곳에 중학생 때 유학을 가서 생활을 하여도 완벽해 질 수가 없는지 하는 의문이었다. 이를테면 이 생각을 밀고 나가 보면, 왜 미국에서 7년이나 공부를 한 사람이, 미국 7세 어린이보다 영어의 발음 및 유창성, 영어에 대한 네이티브적 감각이 떨어지는지에 대한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해도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7세 어린이라면 솔직히 3살정도까지는 인지 능력조차 별로 발달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 이후에 유아교육기관이나 유치원을 다녔다고 하더라도, 고도의 인풋이 하루에 8시간 정도 이상 이루어지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성인이 7년정도 하루에 8시간씩 해당 언어로 공부하고, 소통하고자 노력한다면, 발음과 같은 physical한 부분은 백 번 양보해서 어렵다고 하더라도, 상당수준의 유창성과 이해도를 갖춰야 한다고 추측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심지어 아이들보다 더욱 높은 수준의 인풋이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일 터인데?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나 또한 영어와 일본어, 그리고 중국어를 공부하면서 정말 여러 번 좌절했고, 지금도 좌절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많은 진척을 이루기도 했지만,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특히 영어와 일본어의 학습 과정은 심지어 나에게 트라우마마저 안겨 준 것 같다.  징징거림은 이쯤에서 그만 두고, 조금 냉정하게 지금의 내가 어떻게 외국어를 배웠는지 돌이켜보면서 깨닫게 된 한 가지 가설을 공유하고자 한다.

 

외국어 습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고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현재의 나는 아무 망설임 없이, ‘당신이 말하는 외국어를 편견 없이 들어주고, 당신에게 외국어로 아무런 편견 없이 말 걸어 주는 사람의 존재’ 라고 말할 것이다. 단 한 명이라도 좋다. 당신이 외국어로 말을 할 때 그것을 지겨워 하거나, ‘외국인이 서툴게 말을 하고 있네’하는 의식을 가진 채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들어 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 그리고 당신에게 쓸데없는 배려나, ‘혹시 내가 하는 말을 못 알아 듣는 거 아니야?’ 하는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외국어로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의 존재가 중요하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외국어 실력은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흔히들 외국인 이성친구를 사귀면 외국어가 엄청 는다고 하는데,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왜 실력이 느는가? 그것은 이성친구가 된 이상, 두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외국어라는 형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이 하는 외국어를 당신의 이성친구는 메시지 자체로 받아들이고, 당신과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외국어 화자로서의 당신을 배려하며 말을 걸기보다, 보통 일반적인 모국어 화자끼리의 대화와 유사하게 당신에게 말을 걸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모두 모국어를 성공적으로 배웠다. 우리의 지능, 환경, 성격은 모두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거의 예외 없이 모국어를 성공적으로 구사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우리가 모국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우리가 아무리 이상한 소리를 지껄여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고, 또 그 메시지에 대해 자연스럽게 응대해 준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부모님일 수도 있고, 다른 주 양육자일 수도 있으며, 주변의 친구들과 친척들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다소 추상적인 이야기가 되겠지만, 누군가 그렇게 마음을 열고, 해당 언어로 편견 없이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말을 배운다는 것은 어쩌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다는 뜻이며, 그 사람과 지속적으로 의사소통을 하면서 언어의 가장 중요한 여러 요소 – 즉 발음, 문법, 어감 등을 아주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언어 습득능력에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 면이 있다고 생각하며, 이는 모국어 화자간의 말투 전이 현상을 봐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족끼리, 혹은 같은 부서, 같은 반 사람들의 말투가 묘하게 닮는 현상이 그것이다. 크게 보아서는 방언의 존재도 그러하다. 누구도 일부러 그렇게 말 하라고 가르친 적이 없는데, 사람들은 특정한 말투와 억양을 형성하고, 그것을 집단 내에서 공유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말투의 변이는 계속 일어난다. 노인이 아이나 청년의 말투로 이야기 하는 것을 본 적 있는가? 그 노인이 아이나 청년이었을 때도 그렇게 말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경상도 산골에서 할머니와 단 둘이 살던 소녀가 서울에 올라와 변호사가 되어 로펌에 근무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그녀가 완벽한 서울말을 쓴다고 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아도 모두들 충분히 그럴 법한 사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서울말을 배운다고 억양, 어휘를 분석하고 녹음하여 연습하고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녀는 아이가 서울말을 배우듯이, 주변과의 의사소통 과정에서 다소 의식적으로 노력은 했겠지만, 그러나 꽤나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습득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것이 바로 언어 습득능력은 생각보다 쉽게 죽지 않는 다는 하나의 증거이다. 다만, 사투리를 쓰는 사람은 표준어를 쓰는 사람과 더욱 자연스럽게 편견 없이 소통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외국어의 경우에는 이게 쉽지 않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외국어를 배우고자 할 때, 편견 없이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는 상대를 찾을 수 있다면, 그 사람과의 지속적이고 계속적인 교류를 통해 매우 쉽고 자연스럽게 말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대를 찾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성인이 되어서는 더더욱 그렇다. 말을 더듬더듬하는 바보 같아 보이는 이방인에게, 이 바쁘고 이기적인 사회에서, 어느 누가 마음을 열고 그런 상대가 자발적으로 되어 주겠는가?   그리고 설령 시간을 내서 신경을 써준다고 해도, 동등한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선생과 제자의 관계가 성립되어 버리거나, 벌써 신경을 써서 모국어 화자간의 커뮤니케이션과 다른 방식의 대응이 이루어져 버리는 데서, 진정한 학습이 이루어지기는 틀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어쩌면, 외국어 습득의 가장 큰 벽은, 서로 자연스러운 대화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편견의 벽을 깨는 것, 그리하여 처음엔 다소 서툴더라도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는 상대를 찾는 것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위와 같은 ‘자연스러운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는 상황의 문제점’ 을 간접적으로 설명하는 예로서 나는 흑인 영어를 들고 싶다. 참 이상하지 않은가? 흑인들은 처음엔 노예로 잡혀갔다지만, 그 자손들은 미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백인들과 똑 같은 영어를 써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그렇지 않았고 흑인 영어라는 발음, 어투, 어휘, 문법 등이 꽤나 특징적인 하나의 새로운 영어 방언을 탄생시켰다. 이것이 바로 백인이 흑인을 대할 때 동등하고 자연스러운 커뮤니케이션의 기회를 철저히 배제하고 있었다는 것의 반증이 아닐까? 만약 그러했다면 결코 이러한 이상한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다소 목소리나 발성이 틀릴 수는 있어도, 어떻게 지역적으로 분리되지도 않았는데 그러한 새로운 말이 탄생할 수 있다는 말인가?

 

또 하나, 나는 비정상회담이나, 미녀들의 수다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서 한국어가 유창한 외국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 뒤에 있는 한국인의 말투가 떠오른다. 즉, 그들 또한 한국어의 어떤 한 특징적인 말투가 전이되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즉 그들의 한국어가 그만큼 유창하게 된 데에는 어떤 ‘특정 개인’의 존재가 컸다는 바를 시사한다. 그들의 한국 생활에 있어서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고,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 그들과 자연스럽게 한국어로 커뮤니케이션을 해 준 그 개인의 말투가 바로 그들에게 옮겨왔으리라. 

 

그리고 또 하나, 나는 일본에서 있으면서 일본어가 매우 유창한 한국인을 자주 보는데, 교포나 어린 시절에 일본에 온 사람이 아니면, 모두 거의 대부분 액센트가 심하게 남아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 그 사람은 스스로가 발음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는 두 가지 점을 의미한다. 먼저 말을 워낙 유창하게 하고 (한국인은 일본어를 배우기 쉽다), 일본어를 정말 잘 이해하기 때문에, 스스로가 일본어 발음을 못한다는 것을 상상조차 못하고 있다는 점과, 결국 대부분의 ‘성인이 되어 일본에 온’ 한국인은 일본어를 아무리 잘하더라도, 주변에 늘 일상을 함께하고 그 사람과 커뮤니케이션을 해 줄, 그래서 자연스러운 말투와 발음을 전이시켜 줄 수 있는, 일본인 친구를 사귀는 데에는 실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 또한 내 일본어 발음과 억양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2년이 넘어서야 겨우 알았다. 그리고 나 또한 위에 제기한 두 가지 문제를 모두 안고 있다.  나의 경우 3년 정도 걸려서 겨우 한 두 명 좋은 사람들을 사귀어서 그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대화’를 듣게 되고, 스스로의 일본어 억양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유심히 듣게 되면서 그나마 문제를 캐치했지만, 아직도 솔직히 나는 내 일본어 발음과 억양이 어디가 이상한지 스스로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일이 바쁜 나머지 사람을 사귀지 못하고 자연스럽고 편안한 대화의 장에 자주 참여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 아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배타성에 가슴이 아프기도 하다.  만약 한국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의 커뮤니티에 더욱 자주 초대되고, 일본 사람들에게 있어 백인들처럼 자랑할 만하다고 여겨지는 ‘외국인 친구’ 여서 쉽게 일본인들의 집단에 낄 수 있었다면 아마 대부분은 정말 일본사람과 다를 바 없는 유창한 일어를 구사했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관찰한 바로는 한국사람이 일본 사람들의 조직에 끼어들기 위해서는 일본인의 문화, 습성, 사람 사귀는 방식, 예절까지 다 맞춰 줘야 겨우 겨우 끼워주는 정도였는데, 나는 내가 이렇게까지 하면서 내 일본어를 완벽한 것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야기가 좀 새었는데, 어찌되었든 전달하고 싶은 것은 마음을 열고 대화하는 것이 가져오는 마법적인 효과이다. 지금은 외국어 습득에 국한하여 이야기하였지만, 사실은 인간 사이의 효과적이고 진실한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어찌되었든 지금의 결론을 다시 정리하자면, 외국어 습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해당 외국어를 말할 때 그걸 즐겁게 들어주고, 그에 대해서 아주 자연스럽게 대응해 주는 해당 외국어의 모국어화자의 존재가 아닐까 하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외국어 습득 방식을 다시 점검해 본다면, 생각보다 많은 힌트가 주어질 수 있다. 가령, 외국어를 공부할 때 가장 좋은 방식은 원서를 대량으로 읽는 것인데, 왜냐하면 독서라는 것은 결국 저자와의 대화인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글을 쓰지 않았다. 따라서 다소 일방적이지만, 자연스러운 양질의 인풋을 대량으로 얻을 수 있으며, 책은 결코 편견을 가지고 독자를 대하지 않는 다는 점에서 매우 좋은 대상이다. 또한 가령 원어민 교사와 친해질 수 있다면 위와 같은 점을 고려해서,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을 구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는 등의 방식으로 응용할 수 있다. 쉽진 않겠지만……. 이야기가 좀 길어졌지만, 이것으로 조금이나마 내가 얻은 힌트를 많은 사람과 공유할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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