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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s

디폴트 by 오윤석

by FarEastReader 2024.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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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가치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회의감을 가지고 있다. 도대체 이 바쁜 시대에, 우리는 왜 소설을 쓰고, 또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 나는 내 나름으로 여러 답을 생각해 왔지만, 그 중 가장 진지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바로 '문자가 전달하는 높은 정보량에 근거한 수준 높은 간접체험'이라는 답이다. 

 

단순한 재미라면 유튜브나 웹툰, 영화, 드라마 등을 이길 수가 없고, 정보 습득을 하고자 한다면 인터넷을 이길 수가 없는 시대에도, 문학은 우리에게 색다른 가치를 여전히 전달한다. 문자는 여전히 영상이나 그림이 전달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풍부하고 많은 내용을 전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어휘의 선택이나 이야기를 제시하는 방법, 문체와 문장의 활용을 통해 생각보다 복잡하고 다양한 분위기와 정서를 창조해 낼 수 있다. 이러한 텍스트의 힘을 바탕으로, 지금 우리 시대의 소설은 타인의 삶의 경험과 그 안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 그리고 그 안에서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생생히 기록하고 전달하게 하는 것에서야 말로 최고의 가치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전 이 블로그에서 소개한 몇몇 소설들 역시, 그러한 관점에서 나는 매우 높은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강력계 형사가 실제 경험한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써 낸 '열대야' 같은 소설이나, 한 변호사의 관점에서 그의 삶과 그가 수임하여 경험한 사건을 바탕으로 자아의 문제를 다룬 '한 남자' 같은 소설이 유난히 재미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관점에서 높은 가치를 가졌기 때문이다. 여성 탈북자가 쓴 '태양을 훔친 여자' 역시, 같은 맥락에서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2023.06.19 - [Book Reviews] - 열대야 by 이인열

2022.12.24 - [Book Reviews] - ある男 (한 남자) by 平野啓一郎 (히라노 게이치로)

2023.06.19 - [Book Reviews] - 태양을 훔친 여자 by 설송아

 

약간 관점은 다르지만, 중국 작품 '창랑지수' 역시 중국의 개혁개방 후 현대화를 살아낸 공무원의 관점을 간접체험하는 측면에서 상당한 수작이다. 

 

2023.03.27 - [Book Reviews] - 沧浪之水 (창랑지수) by 阎真 (옌 쩐)

 

 

이번에 읽은 '디폴트' 또한 그러한 관점에서 매우 높은 가치를 가진 작품이라고 하겠다. 사실 우리나라가 여러모로 대단하긴 해도, 사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사모펀드와 헤지펀드를 중심으로 한 대체투자 분야에서도 상당히 최첨단을 달리고 있다. 그 운용규모나 전문성 측면에서 미국과 영국 및 서유럽 몇 국가를 제외하고는 우리나라만큼 본격적으로 대체투자를 전개하고 있는 나라도 드물다. 세계 최대 규모급인 국민연금과 2000억달러를 넘게 운용하는 KIC (한국투자공사)는 물론, 각종 연기금 , 공제회,  금융그룹 (은행, 증권, 캐피탈), 보험사, 각종 은행급 협동조합 (농협, 수협, 새마을금고 등)에서 매우 활발히 축적한 자본을 투자하고 있고, 꽤나 좋은 실적을 거두어왔다. 전체적인 자산운용 측면에서는 좀 모자랄 수 있어도, 이 대체투자 측면만 따지고 보면 이웃나라 일본보다도 더 적극적이고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 대체투자 업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실제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막연히 유학파 출신의 화려한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우아하게 굴리고 있을 거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실제 자금을 분배하고 투자하는 앞에서 말한 기관투자자들 속에는 의외로 평범한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여러 고민과 부단한 학습, 그리고 치열한 협상과 협의를 하며 조금씩 조금씩 더 안전하고, 더 높은 수익을 위해 분투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 소설은 마치 현장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 겪었던 일을 재미있게 들려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만큼 생생하고, 또 흡인력이 강하다. 유명 연주가의 피아노 연주를 콘서트홀이나 CD로 듣는 것보다, 아는 사람이 직접 연주하는 피아노를 바로 옆에서 들으면 훨씬 그 음악이 생생하고 아름답게 들린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이 소설이 딱 그런 느낌이다. 화려한 문학적 기교나 아름다움, 기교는 없지만 정말 재미있게 몰입해서 읽을 수 있고, 금융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리와 사고 방식을 아주 분명하고 피부에 와닿는 방식으로 느낄 수 있다. 금융업에서는 '무언가를 주려면, 반드시 명분이나 실리 그 둘 중 적어도 하나를 꼭 받아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 책에서 배울 수 있는데, 이런 것을 이렇게 생동감 있고 재미있는 스토리를 통해 얻어 갈 수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다.

 

또한 이 소설의 숨겨진 매력은 인물의 활용법이다. 능력이나 태도 면에서 존경스러울 정도의 금융맨이 나오는 한편, 남에게 모든 걸 떠넘기고 혼나야 하는 상황이나 책임져야 하는 일은 무조건 도망쳐 버리는 비겁한 직장 상사도 나온다. 거대 기업을 과감히 일으켰다가 확실하게 말아 먹고 금융사고를 일으키는 와일드한 기업인이 나오는가 하면, 자기만의 냉철한 방식으로 철저히 제도권의 제도와 지식을 활용하여 돈을 버는 미국 금융가도 등장한다. 그리고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주인공과 여러 담당자들의 모습이 잔잔히 수놓아져 가면서, 그 안에서 자신과 자신이 속한 조직의 이익을 극대화 하기 위해 다양한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병정과 장수로서의 모습이 글 안에서 내내 번득인다.

 

이러한 인물들은 때로 한국 사람이기도 하고, 또 미국인이거나 중국인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저자가 상당히 글로벌한 경험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또한 사람을 묘사할 때 단정적이고 평면적으로 재미없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이 먹는 음식, 마시는 술, 하는 행동과 함께 그 인물의 언행 - 즉, 말과 행동-으로 그 사람에 대한 여러 단면을 제시하여 독자로 하여금 빠르고 또 정확하게 작가가 창조한 인물의 특징을 파악하게 하고, 그 인물들이 실제 사건을 대하는 모습을 통해 독자가 사건을 파악하고 따라가게 하는 전개가 매우 흥미로웠다. 이렇게 인물을 간결하게 활용하여 소설의 몰입도를 높여가는 작법이 매우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이 소설은 투자한 회사가 원금과 이자를 갚지 않는 문제상황 - 즉 디폴트 상황 - 발생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이 소설의 마지막 장까지 이 상황 자체가 완벽하게 해소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디폴트 상황 발생 이후 여러 이해관계가 대립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면서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다가, 가장 시급하고 긴급한 문제가 해결되고 모두가 한숨을 겨우 돌리는 그 때에, 이 소설은 끝이 난다. 놀랍게도 오픈 엔드인 것이다. 이 점에서 나는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그 이후 또 어떤 변수가 닥칠지, 또 결국 결국 투자금의 회수는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작중 인물들과 독자는 또 내일을 맞이해야 하고, 업무 관련하여 날아올 문자를 읽어야 하며, 메일을 확인 해야 하는 미래를 남겨 놓은 채 이야기를 끝내게 된다.

 

친구가 들려주던 이야기는 일단 현재 진행형인 상황으로 마무리 되는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지켜 봐야지. 투자가 쉬운 일이 아니란다." 이야기를 신나게 풀어 놓던 저자가 툭 던져 놓고 빙긋 웃는 것 같다. 이제 이야기를 듣던 당신이 요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이야기 해보라는 표정으로 말이다. 그렇다. 소설의 끝과 함께 우리는 몰랐던 세계의 흥미로운 이야기에서 벗어나 다시 자신의 삶으로 담담히 돌아가게 된다. 우리에겐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고, 끝날 때 까지 끝이 아닌 일들이 있기에 긴장을 놓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오래 전 보았던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4월 이야기'의 여운과도 매우 닮았다.

 

四月物語 (4월 이야기),    岩井俊二(이와이 슌지) 감독

 

저자에게 꼭 전하고 싶다. "다음에 만나면 나중에 그 투자건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 꼭 이야기 해 주세요."

 

귀한 경험과 지식을 이렇게 멋지게 공유해 준 저자에게 정말 감사하다. 앞으로 이런 식의 '이야기'가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의 힘은 여전히 강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 좋은 이야기였다. 금융과 투자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꼭 한번 읽어 볼 것을 추천한다.

 

디폴트 by 오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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